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하인츠 구데리안 (문단 편집) ==== [[폴란드 침공]] ==== 1939년 급작스럽게 구데리안은 3기갑사단을 휘하로 둔 체 19군단 군단장으로 임명된다. 19군단은 폴란드의 침공을 대비하는 부대였으나 그의 부임 이유는 [[폴란드 침공]] 때문임을 뒤늦게 알게 된다. 그의 임무는 폴란드 회랑에 전개된 폴란드군을 섬멸시키고 폴란드의 바닷길을 막은 뒤 바르샤바를 향하는 것이었다. 그는 여기서 세계 최초로 지휘차량을 타고 전선을 뛰어다니며 현장을 통제하는 야전 사령관이 된다. '''첫 실전은 혼란과 실수, 공황의 연속'''이었고 구데리안은 자신의 군단 곳곳을 지휘차량으로 뛰어다니며 직접 상황을 확인하며 혼란을 수습해야 했다. 특히 [[비츠나 전투]]에서 구데리안의 부대는 크게 애를 먹는다. 어쨌거나 그의 군단은 강력한 3기갑사단 등의 활약으로 부여받은 전략 목표들을 순조롭게 달성한다. 막판에 코브린에서 강력한 저항을 받았지만 소련군이 폴란드의 뒤를 치며 상황은 종료되었다.[* 정치적 필요 때문에 공세 실패를 연기하고 결정적인 한방을 소련군이 먹이는 것처럼 보이도록 상황을 연출해줬다는 분석도 있다.] 이 때 구데리안의 군단은 동쪽에서 다가오던 소련군과 브레스트에서 조우했고 합동 퍼레이드를 하는 등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낸다. [youtube(21I3PN0I6PY)][* 폴란드 전역에서 기갑군단이 펼친 모습과 의의는 위의 영상에서 잘 정리해준다.][* 다만 폴란드 기병 돌격에 대한 잘못된 정보가 그대로 실려있다. 시청시 주의 바람.] 폴란드 전역을 거치며 '''독일군은 구데리안이 만든 기갑사단이 매우 효과적이었음을 확인하였고 기병장교들의 요구 관철로 만들어진 경사단 전차부대들이 무쓸모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흩어진 사단을 해체하고 구데리안 방식의 기갑사단으로 6개를 추가 재편하도록 조치 한다.''' 또한 1, 2호 전차의 실전 전투 능력은 형편없음을 확인하였다. 구데리안은 3, 4호전차의 조속한 전력화를 주장하였다. 또한 그의 지론이었던 공세 전투에 있어 견인식 대포의 비효율성을 확인 하였다. 한편 구데리안은 폴란드 전역 막판에 [[귄터 폰 클루게]] 상급대장과 트러블을 일으킨다. 폴란드 전역에서의 19군단은 참전 부대 중 독보적인 진군 거리와 교환비를 찍으며, 그 결과 구데리안은 기사철십자훈장을 수여받는다. 한편 히틀러는 기대하던 기갑사단의 실전모습을 직접 보기 위해 19군단의 전투를 참관하는데, 이때 히틀러의 경호 책임자였던 [[에르빈 롬멜]]은 생전 처음 보는 기갑병과로 무장한 19군단과 지휘차량을 타고 뛰어다니는 구데리안의 기동전 광경을 보고는 충격을 받는다[* 이때까지만 해도 롬멜은 [[전투기|항공 전력]]만이 전쟁을 판가름할 것이라고 주장하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때를 기점으로 그는 기갑 전력 중심주의자로 급선회하였다. 그리고 아이러니하지만, '''[[노르망디 상륙작전|이후 그는 항공 전력에게 인생 최대의 패배를 맛본다]].''']. 보병장교이자 1차 대전 영웅이었던 그는 치명적인 새로운 병과와 작전술이 완성되었음을 직감하고 구데리안의 저술들을 정독한 뒤 기갑사단장으로의 전출을 요청한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01I-121-0011A-23%2C_Polen%2C_Siegesparade%2C_Guderian%2C_Kriwoschein.jpg]] ▲ 1939년 9월 23일 폴란드 브레스트에서 화기애애하게 합동 퍼레이드를 하는 독일군, 소련군이다. 중앙의 연단에 가장 왼쪽에 있는 사람이 구데리안, 가운데 있는 사람이 제20차량화보병사단장 육군중장 마우리츠 폰 빅토린 장군, 그리고 그 옆의 가죽 코트를 입은 사람이 소련 제29경전차여단장 육군중장 세묜 모이셰비치 크리보셰인 장군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